“And Jesus said unto them, Come ye after me, and I will make you to become fishers of men.” KJV — Mark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KJV - 마가복음 1:17
“Jesus chose unlearned fishermen because they had not been schooled in the traditions and erroneous customs of their time. They were men of native ability, and they were humble and teachable,—men whom He could educate for His work. In the common walks of life there is many a man patiently treading the round of daily toil, unconscious that he possesses powers which, if called into action, would raise him to an equality with the world's most honored men. The touch of a skillful hand is needed to arouse those dormant faculties. It was such men that Jesus called to be His colaborers; and He gave them the advantage of association with Himself. Never had the world's great men such a teacher. When the disciples came forth from the Saviour's training, they were no longer ignorant and uncultured. They had become like Him in mind and character, and men took knowledge of them that they had been with Jesus. DA 250.1
"예수님께서 배우지 못한 어부들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당시의 전통과 잘못된 관습에 대해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타고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겸손하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 즉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위해 교육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평범한 삶 속에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영예로운 사람들과 동등하게 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매일 반복되는 고된 노동을 참을성 있게 밟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잠자고 있는 능력을 일깨우려면 숙련된 손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자신의 동역자로 부르셨고,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세상의 위인들 가운데 그런 스승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구세주의 훈련을 받고 나왔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무지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과 성품이 그분을 닮아 갔고,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DA 250.1
“It is not the highest work of education to communicate knowledge merely, but to impart that vitalizing energy which is received through the contact of mind with mind, and soul with soul. It is only life that can beget life. What privilege, then, was theirs who for three years were in daily contact with that divine life from which has flowed every life-giving impulse that has blessed the world! Above all his companions, John the beloved disciple yielded himself to the power of that wondrous life. He says, “The life was manifested, and we have seen it, and bear witness, and show unto you that eternal life, which was with the Father, and was manifested unto us.” “Of His fullness have all we received, and grace for grace.” 1 John 1:2; John 1:16.” DA 250.2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 영혼과 영혼의 접촉을 통해 받은 생명력을 전달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입니다. 생명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생명뿐입니다. 그러므로 3년 동안 세상을 축복한 모든 생명을 주는 충동이 흘러나오는 신성한 생명과 매일 접촉했던 그들은 얼마나 큰 특권을 누렸던가! 그 어떤 동료보다도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그 놀라운 생명의 힘에 자신을 내맡겼습니다. 그는 "생명이 나타나셨고 우리가 그것을 보았으니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우리에게 나타난 그 영생을 너희에게 증거하고 보여 주노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충만하심에서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이 은혜에 은혜를 더하느니라." 요한일서 1:2; 요한일서 1:16." DA 250.2
Read Mark 1:16-20. Who were the men Jesus called as disciples, and what was their response?
마가복음 1:16-20절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었으며,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They were humble and unlearned men, those fishers of Galilee; but Christ, the light of the world, was abundantly able to qualify them for the position for which He had chosen them. The Saviour did not despise education; for when controlled by the love of God, and devoted to His service, intellectual culture is a blessing. But He passed by the wise men of His time, because they were so self-confident that they could not sympathize with suffering humanity, and become colaborers with the Man of Nazareth. In their bigotry they scorned to be taught by Christ. The Lord Jesus seeks the co-operation of those who will become unobstructed channels for the communication of His grace. The first thing to be learned by all who would become workers together with God is the lesson of self-distrust; then they are prepared to have imparted to them the character of Christ. This is not to be gained through education in the most scientific schools. It is the fruit of wisdom that is obtained from the divine Teacher alone.” DA 249.4
"갈릴리의 어부들은 겸손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그분께서 선택하신 직책에 합당하도록 충분히 자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구주께서는 교육을 경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지배되고 그분을 섬기는 데 헌신할 때 지적 문화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시의 현자들을 지나치셨고, 그들은 너무 자신만만하여 고통받는 인류에게 동정하지 못하고 나사렛 사람의 협력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경멸했습니다. 주 예수님은 그분의 은총을 전하는 데 막힘없는 통로가 될 사람들의 협력을 구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꾼이 되려는 모든 사람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자기 불신의 교훈이며, 그런 다음 그리스도의 성품을 전수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과학적인 학교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신성한 교사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의 열매입니다." DA 249.4
Ponder why these men would immediately (Mark 1:16-20) leave everything and follow Jesus.
이 사람들이 왜 즉시(막 1:16~20)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지 생각해 보세요.
“Before asking them to leave their nets and fishing boats, Jesus had given them the assurance that God would supply their needs. The use of Peter's boat for the work of the gospel had been richly repaid. He who is “rich unto all that call upon Him,” has said, “Give, and it shall be given unto you; good measure, pressed down, and shaken together, and running over.” Romans 10:12; Luke 6:38. In this measure He had rewarded the disciple's service. And every sacrifice that is made in His ministry will be recompensed according to “the exceeding riches of His grace.” Ephesians 3:20; 2:7. DA 249.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물과 어선을 버리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배를 복음 사역에 사용한 것은 풍성한 보상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후히 주시는 이"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리니 곧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누르고 함께 흔들어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0:12; 누가복음 6:38. 주님은 이 방법으로 제자들의 봉사에 보상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역을 위해 드리는 모든 희생은 "그분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에 따라 보상받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3:20; 2:7. DA 249.1
Read Mark 1:21-28. What unforgettable experience happened in the Capernaum synagogue, and what spiritual truth can we take from this account?
마가복음 1:21-28을 읽어 보라. 가버나움 회당에서 있었던 잊지 못할 일은 무엇이 며,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영적 진리를 배울 수 있는가?
“Jesus in the synagogue spoke of the kingdom He had come to establish, and of His mission to set free the captives of Satan. He was interrupted by a shriek of terror. A madman rushed forward from among the people, crying out, “Let us alone; what have we to do with Thee, Thou Jesus of Nazareth? art Thou come to destroy us? I know Thee who Thou art; the Holy One of God.” DA 255.2
"회당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우러 오신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포로들을 해방시키려는 사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포의 비명소리에 중단되었습니다. 한 미친 사람이 사람들 가운데서 달려와서 외쳤습니다."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오셨나이까? 나는 주님이 누구신지 아나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시여." DA 255.2
“All was now confusion and alarm. The attention of the people was diverted from Christ, and His words were unheeded. This was Satan's purpose in leading his victim to the synagogue. But Jesus rebuked the demon, saying, “Hold thy peace, and come out of him. And when the devil had thrown him in the midst, he came out of him, and hurt him not.” DA 255.3
"이제 모든 것이 혼란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졌고, 그분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희생자를 회당으로 이끈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마를 꾸짖으시며 "잠잠하고 그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가 그를 가운데로 던졌을 때, 그는 그에게서 나와서 그를 해치지 않았다." DA 255.3
“The mind of this wretched sufferer had been darkened by Satan, but in the Saviour's presence a ray of light had pierced the gloom. He was roused to long for freedom from Satan's control; but the demon resisted the power of Christ. When the man tried to appeal to Jesus for help, the evil spirit put words into his mouth, and he cried out in an agony of fear. The demoniac partially comprehended that he was in the presence of One who could set him free; but when he tried to come within reach of that mighty hand, another's will held him, another's words found utterance through him. The conflict between the power of Satan and his own desire for freedom was terrible. DA 255.4
"이 비참한 고통자의 마음은 사탄에 의해 어두워졌지만 구세주의 면전에서는 한 줄기 빛이 어둠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그는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이 일어났지만, 악마는 그리스도의 권능에 저항했습니다. 그 남자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려 하자 악령이 그의 입에 말을 걸었고, 그는 두려움에 떨며 울부짖었습니다. 악령은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의 면전에 있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이해했지만, 그 강력한 손이 닿는 곳에 가려고 할 때 다른 사람의 뜻이 그를 붙잡았고 다른 사람의 말이 그를 통해 발화되었습니다. 사탄의 권세와 자유를 향한 자신의 욕망 사이의 갈등은 끔찍했습니다. DA 255.4
“He who had conquered Satan in the wilderness of temptation was again brought face to face with His enemy. The demon exerted all his power to retain control of his victim. To lose ground here would be to give Jesus a victory. It seemed that the tortured man must lose his life in the struggle with the foe that had been the ruin of his manhood. But the Saviour spoke with authority, and set the captive free. The man who had been possessed stood before the wondering people happy in the freedom of self-possession. Even the demon had testified to the divine power of the Saviour. DA 256.1
혹의 광야에서 사탄을 정복한 그분은 다시 그분의 적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악마는 희생자를 계속 지배하기 위해 모든 힘을 발휘했습니다. 여기서 지는 것은 예수님께 승리를 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고문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인간성을 파멸시킨 원수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어야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구세주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며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자기 소유의 자유에 행복해하며 궁금해하는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악마조차 구주의 신성한 권능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DA 256.1
“The man praised God for his deliverance. The eye that had so lately glared with the fire of insanity, now beamed with intelligence, and overflowed with grateful tears. The people were dumb with amazement. As soon as they recovered speech they exclaimed, one to another, “What is this? a new teaching! with authority He commandeth even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obey Him.” Mark 1:27, R. V.” DA 256.2
"그 남자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얼마 전까지 광기의 불길로 번뜩이던 그의 눈은 이제 지성으로 빛나고 감사하는 눈물이 넘쳐흘렀다. 사람들은 놀라움에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말을 되찾자마자 그들은 서로 외쳤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분은 권세로 더러운 영들까지도 명하시니 그들이 순종하도다." 마가복음 1:27, R. V." DA 256.2
Read Mark 1:29-34. How did Jesus help Peter’s family, and what spiritual lessons can be drawn from this account?
마가복음 1:29-34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가족을 어떻게 도우셨으며, 이 이야기에서 어떤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While the congregation in the synagogue were still spellbound with awe, Jesus withdrew to the home of Peter for a little rest. But here also a shadow had fallen. The mother of Peter's wife lay sick, stricken with a “great fever.” Jesus rebuked the disease, and the sufferer arose, and ministered to the wants of the Master and His disciples. DA 259.1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여전히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예수님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베드로의 집으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베드로의 아내의 어머니가 "큰 열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병을 꾸짖으셨고, 그 환자는 일어나 주님과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DA 259.1
“Tidings of the work of Christ spread rapidly throughout Capernaum. For fear of the rabbis, the people dared not come for healing upon the Sabbath; but no sooner had the sun disappeared below the horizon than there was a great commotion. From the homes, the shops, the market places, the inhabitants of the city pressed toward the humble dwelling that sheltered Jesus. The sick were brought upon couches, they came leaning upon staffs, or, supported by friends, they tottered feebly into the Saviour's presence. DA 259.2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소문이 가버나움 전역에 급속히 퍼졌습니다. 랍비들이 두려워서 사람들은 안식일에 감히 치유를 받으러 오지 못했지만, 해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기도 전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집과 상점, 시장에서 도시 주민들이 예수님을 보호하고 있는 초라한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병자들은 소파에 눕거나, 지팡이에 기대어 오거나,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구세주의 면전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왔습니다. DA 259.2
“Hour after hour they came and went; for none could know whether tomorrow would find the Healer still among them. Never before had Capernaum witnessed a day like this. The air was filled with the voice of triumph and shouts of deliverance. The Saviour was joyful in the joy He had awakened. As He witnessed the sufferings of those who had come to Him, His heart was stirred with sympathy, and He rejoiced in His power to restore them to health and happiness. DA 259.3
"그들은 시간마다 왔다 갔다 했으니, 내일도 치유자가 그들 가운데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이런 날이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승리의 목소리와 구원의 함성이 공중에 가득했습니다. 구세주께서는 깨어나신 기쁨으로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고통을 목격하시면서 동정심으로 가슴이 뭉클해졌고, 그들을 건강과 행복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그분의 권능에 기뻐하셨습니다. DA 259.3
“Not until the last sufferer had been relieved did Jesus cease His work. It was far into the night when the multitude departed, and silence settled down upon the home of Simon. The long, exciting day was past, and Jesus sought rest. But while the city was still wrapped in slumber, the Saviour, ‘rising up a great while before day, ... went out, and departed into a solitary place, and there prayed.’” DA 259.4
"예수님은 마지막 고통받는 사람이 구제될 때까지 그분의 사역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밤이 깊어 무리가 떠나고 시몬의 집에는 고요가 내려앉았습니다. 길고 흥미진진했던 하루가 지나고 예수님은 안식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도시가 아직 잠에 빠져 있을 때, 구세주께서는 '날이 밝기 전에 크게 일어나서 ... 나가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거기서 기도하셨다'." DA 259.4
Read Mark 1:35-39. What important lessons can be taken from what Jesus did here?
마가복음 1:35-3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은 어떤 중요한 교 훈을 주는가?
“Thus were spent the days in the earthly life of Jesus. He often dismissed His disciples to visit their homes and rest; but He gently resisted their efforts to draw Him away from His labors. All day He toiled, teaching the ignorant, healing the sick, giving sight to the blind, feeding the multitude; and at the eventide or in the early morning, He went away to the sanctuary of the mountains for communion with His Father. Often He passed the entire night in prayer and meditation, returning at daybreak to His work among the people.” DA 259.5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날들은 이렇게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제자들의 집을 방문하고 쉬시려고 제자들을 내치셨지만, 그분은 그분의 수고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제자들의 노력을 부드럽게 물리치셨습니다. 하루 종일 수고하시며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고, 소경에게 시력을 주고, 무리를 먹이셨으며, 행사 때나 이른 아침에는 아버지와의 친교를 위해 산의 성소로 가셨습니다. 종종 그분은 밤새도록 기도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내시다가 새벽이 되면 사람들 가운데서 그분의 일을 하러 돌아오셨습니다." DA 259.5
Read Luke 6:1-12. What does this teach about Jesus’ prayer life?
누가복음 6:12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No other life was ever so crowded with labor and responsibility as was that of Jesus; yet how often He was found in prayer! How constant was His communion with God! Again and again in the history of His earthly life are found records such as these: “Rising up a great while before day, He went out, and departed into a solitary place, and there prayed.” “Great multitudes came together to hear, and to be healed by Him of their infirmities. And He withdrew Himself into the wilderness, and prayed.” “And it came to pass in those days, that He went out into a mountain to pray, and continued all night in prayer to God.” Mark 1:35; Luke 5:15, 16; 6:12. DA 362.3
"예수님처럼 수고와 책임으로 가득 찬 삶은 없었지만, 그분은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까! 그분은 하나님과 얼마나 끊임없이 친교를 나누셨습니까! 그분의 지상 생애의 역사에는 이와 같은 기록이 계속해서 발견됩니다: "날이 밝기 전에 크게 일어나서 나가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거기서 기도하셨다." "많은 무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들의 병을 고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광야로 물러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날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셔서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니라." 마가복음 1:35; 누가복음 5:15, 16; 6:12. DA 362.3
“In a life wholly devoted to the good of others, the Saviour found it necessary to withdraw from the thoroughfares of travel and from the throng that followed Him day after day. He must turn aside from a life of ceaseless activity and contact with human needs, to seek retirement and unbroken communion with His Father. As one with us, a sharer in our needs and weaknesses, He was wholly dependent upon God, and in the secret place of prayer He sought divine strength, that He might go forth braced for duty and trial. In a world of sin Jesus endured struggles and torture of soul. In communion with God He could unburden the sorrows that were crushing Him. Here He found comfort and joy. DA 362.4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삶에서 구세주께서는 여행의 길과 날마다 그분을 따르는 무리에서 물러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그분은 끊임없는 활동과 인간의 필요와 접촉하는 삶에서 벗어나 은퇴와 아버지와의 단절 없는 친교를 추구해야 했습니다. 우리와 하나이시며 우리의 필요와 약점을 함께 나누신 그분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셨고, 은밀한 기도의 자리에서 신성한 힘을 구하셔서 의무와 시련에 대비하여 굳건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세상에서 고난과 영혼의 고문을 견뎌내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교제 속에서 그분은 자신을 짓누르는 슬픔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위로와 기쁨을 찾았습니다. DA 362.4
“In Christ the cry of humanity reached the Father of infinite pity. As a man He supplicated the throne of God till His humanity was charged with a heavenly current that should connect humanity with divinity. Through continual communion He received life from God, that He might impart life to the world. His experience is to be ours.” DA 363.1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의 외침은 무한한 연민의 아버지께 도달했습니다. 그분은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보좌에 간구하셨고, 그분의 인성이 인간과 신성을 연결해야 하는 하늘의 흐름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하느님의 보좌에 간구하셨습니다. 그분은 끊임없는 친교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세상에 생명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의 경험은 우리의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DA 363.1
Read Mark 1:40-45. What does this teach us about Jesus and how he related to the marginalized in society?
마가복음 1:40-45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예수님과 그분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 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셨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Jesus charged the cleansed leper not to make known the work he had wrought upon him, saying, “See thou say nothing to any man; but go thy way, shew thyself to the priest, and offer for thy cleansing those things which Moses commanded, for a testimony unto them.” Accordingly the now happy man went to the same priests who had previously examined him, and whose decision had banished him from his family and friends. 2SP 229.3
"예수께서는 깨끗함을 얻은 나병 환자에게 자신이 행하신 일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시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네 길로 가서 제사장에게 가서 모세가 명한 것을 네 깨끗함을 위하여 바쳐서 그들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이제 행복해진 그 사람은 이전에 자신을 진찰해 주었고, 그 결정으로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그를 추방했던 제사장들에게 갔다. 2SP 229.3
Joyfully he presented his offering to the priests and magnified the name of Jesus who had restored him to health. This irrefutable testimony convinced the priests of the divine power of Jesus, although they still refused to acknowledge him as the Messiah. The Pharisees had asserted that his teachings were directly opposed to the law of Moses, and for the purpose of exalting himself; yet his special directions to the cleansed leper to make an offering to the priest according to the law of Moses, evidenced to the people that these accusations were false. 2SP 229.4
그는 기쁨으로 제사장들에게 예물을 바치고 자신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신 예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이 반박할 수 없는 간증은 제사장들에게 예수의 신성한 능력을 확신시켜 주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의 가르침이 모세의 율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며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깨끗해진 나병환자에게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특별히 지시한 것은 이러한 비난이 거짓임을 백성에게 증명해 주었다. 2SP 229.4
The priests were not allowed to accept an offering from the hands of one who had been afflicted with leprosy, unless they first thoroughly examined him and proclaimed to the people that he was entirely free from the infectious disease, was in sound health, and could again unite with his family and friends without endangering them. However unwilling the priest might have been to accredit this marvelous cure to Jesus, he could not evade an examination and decision of the case. The multitude were anxious to learn the result of the investigation, and when he was pronounced free from disease, and privileged to return to his family and friends, great was the excitement. Such a thing had never before been known. 2SP 230.1
제사장들은 나병에 걸린 사람을 철저히 검사하여 그가 전염병에서 완전히 나았고, 건강하며, 가족 및 친구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다시 결합할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선포하지 않는 한, 나병 환자의 손에서 제물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사제가 아무리 예수의 이 놀라운 치료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라도, 사건에 대한 조사와 결정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군중은 조사 결과를 알고 싶어 했고, 그가 병에서 완치 판정을 받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자 흥분은 대단했습니다. 그런 일은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일이었다. 2SP 230.1
But notwithstanding the caution of Jesus to the cleansed leper he published the matter abroad. Conceiving that it was only the retiring modesty of Jesus that laid these restrictions upon him, he went about proclaiming the mighty power of this great Healer. He did not understand that every new manifestation of divine power on the part of Jesus only made the chief priests and elders more determined to destroy him. The restored man felt the boon of health was very precious. The pure blood coursing through his veins quickened his entire being with a new and delightful animation. He rejoiced in the full vigor of manhood and in his restoration to his family and society. He felt it impossible to refrain from giving full glory to the Physician who had made him whole. 2SP 230.2
그러나 깨끗해진 나병환자에 대한 예수님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사실을 해외에 알렸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러한 제한을 가한 것은 은퇴하신 예수님의 겸손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위대한 치유자의 강력한 능력을 선포하기 위해 돌아다녔습니다. 그는 예수의 신성한 능력이 새롭게 나타날 때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멸망시키기로 더욱 결심할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회복된 사람은 건강의 혜택이 매우 소중하다고 느꼈습니다. 그의 혈관을 흐르는 순수한 피가 새롭고 유쾌한 생동감으로 그의 온몸을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는 남자로서의 완전한 활력과 가족과 사회로의 회복을 기뻐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신 의사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다. 2SP 230.2
But the publicity of this affair created so great a commotion that Jesus was obliged to retire beyond the city. “And they came to him from every quarter.” These miracles were not worked for display; the acts of Christ were in direct contrast to those of the Pharisees, whose greatest ambition was to secure the praise and honor of men. Jesus well knew that if the fact of his cleansing the leper was noised abroad, those in a similar condition would be urgent to obtain the same cure. This would raise the cry that the people would be contaminated by contact with the loathsome disease of leprosy. His enemies would seize such an opportunity to accuse and condemn him. 2SP 231.1
그러나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너무 큰 소동이 일어났고, 예수님은 도시 밖으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왔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보여주기 위해 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과 명예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야망이었던 바리새인들의 행위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준 사실이 해외에 알려지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같은 치료를 받기 위해 몰려들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병이라는 혐오스러운 질병과의 접촉으로 인해 오염될 것이라는 외침이 커질 것입니다. 그의 정적들은 그러한 기회를 포착하여 그를 비난하고 정죄할 것입니다. 2SP 231.1
Jesus knew that many of the lepers who would seek him did not deserve the blessing of health, nor would they use it to the honor and glory of God should they obtain it. They had no real faith nor principle, but only a strong desire to be delivered from the certain doom that awaited them. The Saviour also knew that his enemies were ever seeking to limit his work and turn the people from him. If they could use the case of the cleansed leper for that purpose they would do so. But in directing the healed man to present his offering to the priest, as enjoined by the law of Moses, he would convince them that he was not opposed to the Jewish code, if their minds were open to conviction. 2SP 231.2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나병 환자들 중 상당수가 건강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설령 건강의 축복을 받는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믿음도 원칙도 없었고, 단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확실한 운명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강한 열망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구세주께서는 또한 정적들이 자신의 사역을 제한하고 백성들을 그에게서 멀어지게 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 깨끗해진 나병환자의 사례를 이용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대로 치유받은 사람에게 제사장에게 예물을 바치라고 지시하면서, 그들의 마음이 열려 있다면 그는 유대 율법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킬 것입니다. 2SP 231.2
Isa. 7:21, 22 –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a man shall nourish a young cow, and two sheep; and it shall come to pass, for the abundance of milk that they shall give that he shall eat butter: for butter and honey shall every one eat that is left in the land.
사 7:21, 22 - 그 날에 사람이 어린 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를 기르며 그들이 주는 젖이 풍성하여 버터를 먹으리니 이는 버터와 꿀이 땅에 남은 것을 각 사람이 먹을 것임이니라 - 그 날에 이르리니, 그 날이 이르리라.
Imagine one cow and two sheep supplying with butter and honey all who are left in the land! Since a literal cow and two sheep could not possibly do this, we must agree that they are symbolical of something which is not only capable of producing an abundance of milk, but is able also to preserve the lives of its patrons.
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가 이 땅에 남은 모든 사람들에게 버터와 꿀을 공급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문자 그대로의 젖소와 양 두 마리는 이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젖소와 양이 풍부한 우유를 생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후원자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무언가를 상징한다는 데 동의해야 합니다.
There is but one thing that consists of three such parts (two sheep and a young cow) that is capable of keeping the world alive, and that is the Bible – unfolded by the Spirit of Prophecy, the Spirit that leads into all Truth. The two sheep, not being young, and two of a kind, must be symbolical of the Bible Itself, both Old and New Testaments. The cow being young and larger in size, is obviously symbolical of something of later origin, and more voluminous than the Bible itself. Hence it is none other than the published works of the everliving Spirit of Prophecy – the inspired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s.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세 부분(양 두 마리와 어린 소 한 마리)으로 구성된 것은 오직 하나, 예언의 영,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는 영에 의해 펼쳐지는 성경뿐입니다. 어린 양이 아닌 두 마리의 양은 구약과 신약 모두 성경 자체를 상징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젊고 크기가 큰 소는 분명히 성경 자체보다 후대의 것을 상징하며 성경 자체보다 더 방대한 것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다름 아닌 영감으로 성경을 해석한 영원한 예언의 영의 출판물입니다.
Those that are left in the land, therefore, when Christ takes His scepter to reign, are those who live on the butter and honey which only the Bible and the Spirit of Prophecy can supply. All others are to perish with the modern Edomites and Moabites.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잡으실 때 그 땅에 남는 사람들은 오직 성경과 예언의 영만이 공급할 수 있는 버터와 꿀을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은 현대의 에돔 족속과 모압 족속과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In the same symbolical prophecy we are shown that Christ Himself learned the difference between right and wrong by studying the Scriptures:
동일한 상징적 예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옳고 그름의 차이를 몸소 깨달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Isa. 7:14, 15 – Therefore the Lord Himself shall give you a sign; Behold, a virgi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shall call His name Immanuel. Butter and honey shall He eat, that He may know to refuse the evil, and choose the good.
사 7:14, 15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주시리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버터와 꿀을 먹으리니 이는 그가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할 줄 알게 하려 하심이라.
No one would deny…that this is a prophecy of Christ’s first advent. And as we have the record that His diet was not of dairy butter and of bee honey, not restricted as was John the Baptist’s, also by the fact that no literal butter and honey has the efficacy of compelling anyone to choose the good and to refuse the evil, it all proves that the “butter and honey” are symbolical of the Word of God, that Christ Himself learned from the Scriptures to choose the good and to refuse the evil.
이것이 그리스도의 첫 번째 강림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처럼 유제품 버터와 벌꿀을 먹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고, 문자 그대로 버터와 꿀이 누구에게나 선을 선택하고 악을 거부하도록 강요하는 효능이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버터와 꿀"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자신이 성경에서 선을 선택하고 악을 거부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Here you see that one needs a daily supply of spiritual butter and honey if he is to sustain his spiritual life. That is, yesterday’s meal could not take the place of the meal today – no, no more than Noah’s inspired message for his day, can take the place of the inspired message of the Kingdom today.
여기서 영적인 삶을 유지하려면 매일 영적인 버터와 꿀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어제의 식사가 오늘의 식사를 대신할 수 없으며, 노아가 그 시대에 영감받은 메시지보다 더 이상 오늘날 영감받은 왕국의 메시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Only the Heaven-sent message for today can save the people of today. This is just as real and as true and as logical as it is to say that the living cannot be judged with the message of the judgment of the Dead. Yes, “blessed is that…faithful and wise servant, whom His Lord hath made ruler over His household, to give them meat in due season.” Matt. 24:45, 46.
하늘이 오늘을 위해 보낸 메시지만이 오늘날의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심판의 메시지로 산 자를 심판할 수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이고 진실하며 논리적인 말입니다. 예, "주께서 그 집의 관리자로 삼으신...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은 복이 있나니 때가 되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24:45, 46.